연시(軟枾)의 추억
연시를 홍시(紅枾)라고도 한다.
옛날 고향집 동네에는 온통 감나무가 무성해서 감을 수시로 먹으며 자랐다.
마을이 북풍이 막히는 지세여서 감나무가 그렇게도 잘 되었었나보다.
내 기억으로는 월하라는 감은 초가을에 붉게 여무는데 그걸 따서는 항아리에 넣고 뜨끈하게 뎁힌 물에 소금을 풀어 넣고 항아리를 이불로 덮어 놓은후 하루정도 지나 꺼내면 떫은 맛이 전혀없고 단맛의 감이 되는데 그걸 침시(沈枾)라 했다.
그걸 수원이나 안양등지로 어른들이 내다 파는걸 보며 자랐다.
그 감은 연시가 연하긴 하나 별로 맛은 없었던것 같다.
또 장준이란 감이 있는데 이 감이 바로 연시로서는 최고의 감이다.
요즘에도 많이 유통되는 연시용 감이 바로 그것이다.
그 옛날 음력 10월초가 되면 시향제를 곳곳에서 지냈는데 학교가 끝날새 없이 우리는 산으로 달려가 몫을 받고 떡을 얻어 먹었다.
그런데 허연 도포를 입은 노인네들은 돗자리에 앉아 조청에 떡을 찍어 잡숫고
그 연하디 연한 연시를 잡수시는데 ... 그게 얼마나 먹고싶었는지 모른다.
늦가을에 장준감을 따서 체반이나 항아리 속에 가즈런히 넣은 다음 햇볕 안드는 광이나 벽장에 가려두고 그걸 겨우내 꺼내먹던 기억이 생생 하다.
그리고 깨어진 감은 켜서 곳감을 말려 두었다가 간식으로 먹었던 기억....
60년대의 시골은 그랬다.
요즘에는 새로운 농법이 나와 단감이 사철없이 나오고 연시도 구하고자 하면 언제든 사올수 있으니 격세지감을 아니 느낄수 없다.
지난 가을에 감을 1접 사다가 두었더니 모두가 먹기 좋게 익었건만 다큰 아이들인데도 통 먹질 않는다.
그저 우리 내외가 심심하면 꺼내다 먹을뿐.....
그런데 그 감나무는 반드시 고염나무에 감나무를 접을 붙여 길렀다.
즉 감을 그냥 심으면 아주 작은 감이 연다, 그걸 우린 속소리감이라고 했는데
먹을것도 없고 작아서 쓸모가 없었다.
장년에 이른 지금에 와서도 이해가 안되는 점이 어째서 감은 저 자신의 씨앗으로는 똑같은 이세를 볼수 없는것인가 ? 하는 점이다.
생물학은 그만 접어두고 ~
하여간 그 고염이란놈.... 그것 처럼 단것도 없었다.
고염은 수확 하기도 참으로 까다롭고 어렵다.
지금처럼 넓찍한 포장이라도 있었다면 좋겠지만 그것도 없던 시절이고 그나마 멍석을 펴고 털수만 있다면야 따질것이 없겠지....
하지만 대부분의 고염나무는 감나무 보다 더욱 열악한곳에 심던 나무다.
그 옛날에도 고염은 감보다 경제적 가치가 떨어졌으니 자연 산비탈이나 덤불 근처 아니면 하천옆 등지에다 심었기때문에 도저히 무엇을 깔고 어찌할 방도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니 장대로 털고 줏어 담자니 온통 흙에 모래에 검불이 묻어서 지저분 하기 그지없는 그놈을 작은 독에다 담아두고 한겨울에 대접에 떠다가 먹어보면 그 맛이 정말이지 감보다 좋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무튼 오늘 감 연시를 보며 옛 추억을 떠 올리자니 별 생각이 다 난다.
먹을것은 지천인데도 마음 한켠이 빈듯한 기분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