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뜨기의 겨울나기
겨울의 산골 동네는 온통 얼어 붙는 추위 속이다.
서산에 해가 뉘였뉘였 넘어갈 때쯤이면 초가집 여기저기서 저녁연기 피어
오른다.
70년대 초 내가 살던 고향의 풍경이다.
서너명의 나뭇꾼이 줄을 이어 나뭇짐을 지고 내려와 제각기 제집 마당에 털썩
지게째 부려 던진다.
소죽 쑤고 굼불 때는데는 싸리 나무 강 참나무가 제격이고 밥짓는 나무로는 억새
나 소나무 죽은 가지가 제격이었다.
솔밭에 빨갛게 깔린 솔가래(솔잎)는 갈퀴로 긁어 모아 전을 치고 장한 억새를
베어 가장자리에 두르고 칡으로 동을 엮으면 보기좋은 나뭇동이 되었다.
어머니는 그 솔가래를 부엌에 귀중하게 쌓아 두시곤 밥을 뜸 들일 때만 쓰셨다.
가랑잎이 많이 쏟아진 나무 밑에는 대충 낮으로 뿜어 놓고 역시 갈퀴로 긁어모아
나뭇가지를 겉에 대고 전을 처서 지게에 싣고 지게꼬리를 동여매면 태산만한
나뭇짐이 되었는데 그건 넘어져 메첬다 하면 몽조리 산에다 흩뿌려 버리게
되므로 도로아미 타불이 되곤 했었지만 역시 다양하게 땔수 있는 나무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가장 화력 좋기로는 굵직한 싸리나무였는데 그놈은 무거워
서 지게에 얼마 지지도 못할뿐만 아니라 낮의 날이 베릴 정도로 강하다.
그래서 요령있는 사람들은 싸리나무를 베지를 않고 나무의 밑둥을 낮 뒷통수로
강하게 치면 그냥 포가지에서 쩌개져 나오곤 하였다.
역시 잘 타기로는 자기나무인데 그것 역시 무겁기가 천근 같이 무거웠다.
소죽 쑤고 굼불 때는 데는 아무 나무나 다 땠는데 특히 눈이 많이 온날에는 집뒤
에 가서 아카시아 나무를 베어다가 자를것도 없이 아궁이에 걸처놓고 작대기
V 자로 우겨넣고 불을 질러대면 물나무에서 내뿜는 수증기가 칙칙대는 모습
이 신기하기 까지 했었다.
그런가 하면 고경나무라는 노란색깔의 나무가 있는데 그걸 옹이가 없이 쪽
뻗은 놈을 골라 나무의 속을 빼내는데 가느다란 단단한 나무를 다듬어 그 나
무의 밑둥 가운데 노오란 속살에 맞추어 끼어 넣고 돌에 쿡쿡 때려 박으면서
껍질을 벗겨 내면 맨나중에 길다란 나무의 속살만 나오게 된다.
그걸 싸리나무를 반으로 쪼개어 거기다 돌돌 말아 끼운후 끈으로 동여 매면
보기좋은 아이들 소품이 되었다.
모르겠다, 그 나무와 이름이 내가 살던 마을에선 고경나무라 했는데 다른 지방에
서는 무어라 불렀는지 알수 없다.
또 그런가 하면 이따금 불을 때다 보면 나뭇가지에 새파란 청개구리 집이 대롱
대롱 매달려 있으면 그걸 가지고 놀던 기억도 생생하다.
지금에 와 생각해 보니 그게 곤충의 집이란걸 알았지만 그때는 정말 청개구리가
사는 집으로만 믿었지 아니한가.
십대 후반에 접어 들던 때의 식욕은 그야말로 왕성 하기만 했다.
특히 겨울이면 밤에 마실방에 모여 고구마를 까먹거나 묻어둔 무까지 꺼내다
먹었는데 그러다가 덴찌(랜턴)를 들고 집집마다 초가집 추녀 끝을 비춰가며 이엉
에 구멍을 내서 들어가 잠자고 있는 참새를 잡아다가 구워 먹곤 하였다.
그게 먹을게 모가 있을까마는 그 시절엔 그런 장난이 아니었다면 긴긴 밤을 보낼
만한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전기도 없어 오로지 등잔불 아니면 남포(램프)불이 전부였는데 모가 보이길 하나
볼래야 우리들에게 걸맞는 읽을거리 책이 있었는가 말이다.
그 당시 동네에 나보다 조금 나이든 형이 있었는데 장이 서는 날이면 어김없이
지게나 싸리비를 만들어 내다 팔고는 국수나 빵을 사다 놓고 팔고 있었다.
물론 그는 그렇게 해서 담배 값은 번다며 말이다....
그러니 그때 부터 우리는 화투를 배우게 되었는데 모두 그 형이 가르쳐 주었
다.
달력 뒤에다 김모,이모,박모...이런식으로 적고 뻥을 치게 하고서는 판마다
끝발을 적어 1등은 공먹고 나머지가 차등해서 돈을 내는 방식의 국수뻥,빵뻥
에 영일 없었다.
사실 말이지 비빔국수는 한겨울밤 잘익은 김장김치 썰어넣고 참기름 넣어
비벼낸 그 맛에 1관(3,75KG) 짜리 국수가 매일 동났다.
화투가 좋기나 했나 ~ 그 당시 화투는 막종이 여러겹 속에 회를 넣어 만든거
라 조금만 구부리거나 힘을 주면 부러지는 조잡한 형편이었다.
그러니 껍질 까진 화투를 가지고 서로들 칠이니 흑싸리니 우기기 일수였고
ㅎㅎ
그걸 기화로 곧잘들 속이기까지도 했었다.
그 당시 산골의 어려운 사람들은 겨울이면 산토끼도 잡고 더러는 꿩도 잡아 추녀
에 걸어 놓으면 의례히 그날밤에 동네 사람들이 뻥치기로 사다 해 치웠다.
나는 그 당시 초짜에 속한 나머지 맨날 형들이나 동네 어른들 술 심부름을 갔다
와야 했는데 그게 얼마나 멀었던지 모른다.
국민학교 있는 마을까지 거리가 십리였는데 그 모라더라? 4홉들이는 까마구
(간장색깔), 1.8L 짜리 댓병소주는 이쇼라며 그걸 몇병을 사오라고 하면 추운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뛰어 다니던 기억이 생생하다.
몇십원 남는 거스름돈 그것을 챙기는 재미와 얻어먹는 국수 맛이 그때의 잊
을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난번 고향동네에 들려 잠시 옛 친구들과 한잔술을 기울이며 지나간 일들을
이야기 하노라니 그야말로 세월이 유수 같이 흘렀음을 알게 되었다.
이젠 그때의 형들도 나의 친구들도 한판 놀자며 펼쳐내는 놀이가 최하가 고
스톱 아니면 훌라에 섯다를 하자하니 자못 씁쓸한 마음을 지울길 없었다.
뻥이나 치자 했더니 그건 싱겁다며 한사코 고스톱을 치자 해서 잠시 놀긴 했
지만 성냥 내기에 밤을 패고 국수뻥에 새벽에 헤어지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리
운건 역시 겨울이 주는 추억의 산물인가 하는 마음에 흘러간 세월 저편으로
두레
박질 해 보긴 하지만 무었이 남았는지 모르겠다.올해도 이렇게 겨울이 깊어 가는구나 .... 기나긴 동지 속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