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의 말로(末路)
이숙번(李叔蕃)은 태종(太宗)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이징옥(李澄玉)과 조비형(曺備衡)은 모두 그 문하(門下)에서 나왔다.
이징옥은 몹시 교만하고 방자했다 그래서 임금이 불러도 이내 달려가지 않았다.
어느날 손님과 같이 술을 마시고 있는데 마침 임금이 부르자 병이 있다 핑계하여 그 때문에 외방으로 귀양 갔었다.
세종(世宗)때 이숙번은 순금으로 만든 띠를 도승지(都承旨) 김돈(金墩)에게 주고 서울에 돌아 올수 있게 힘써 달라고 간청했다.
김돈은 순금띠는 욕심이 나지만 그 청을 들을수는 없으므로 매양 조정에 들어갈 때면 반드시 그 금띠를 매만지곤 하였다.
그때 마침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는데 임금이 선조(先祖:태종) 때의 일을 잘 아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김돈은 곧 이숙번을 천거해서 대답했다.
이에 임금은 그에게 명하여 서울로 돌아 오게 하여 고사(故事)를 물어 보도록 했다.
이숙번 은 이미 서울에 돌아오자 그의 문하에 있던 선비들이 모두 와서 뵈었다.
그중에 조비형 과 이징옥은 이미 재추(宰樞)를 지냈고 또 한 사람은 의정(議政:재상)으로 있었다.
이숙번이 자리에 앉는데 문하의 선비들은 남쪽을 향해서 앉게 하고 그 외는 남쪽편에 평좌(平坐) 하도록 하면서 말 하기를
" 이 사람들은 내 문하에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다 " 했다.
그의 사위 김모(金某)가 마침 그것을 보고 놀라며 말 하기를
아아 ! 어찌 이럴수가 있는가,반드시 집안을 망칠 징조다 ! 정승은 상감을 모시는 重臣인데 어찌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 하니
그때서야 비로소 모두 평좌하여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옛 법에 군왕은 북쪽에 앉아 남쪽을 굽어 보며 신하는 남쪽에 앉아 북을 향했다,따라서 북향사배란 임금이 설령 어느곳에 거할지라도 신하는 북쪽을 향해 절 하였다,이숙번의 사위는 장인이 임금처럼 행세 하는걸 두려워 했던것이다.)
그는 폐척(廢斥)이 된 뒤에도 거만 하기가 오히려 이와 같았다.
용비어천가를 다 짓자 임금은 그를 다시 적소(謫所:함양)로 돌아 가도록 명하니 김돈이 아뢰기를 일이 있어 소환된 것이오니 마땅히 특별히 머물러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했으나
임금은 " 그렇지 않다, 숙번은 선왕께 죄를 지었으니 내가 맘대로 불러 쓸 수가 없다 "
하고 이내 배소로 가도록 명하니 김돈은 마침내 금띠를 감히 받을수 없어 돌려 보냈다.
숙번은 비록 귀양가 있으면서도 항상 사치스럽게 하니 그 첩이 이를 근심하여
조금만 절약해서 뒤에 곤란한 일이 없도록 합시오 ! 하니
숙번은 그 말에 크게 노하여 즉시 목베어 죽이도록 명했다.
그의 호기롭고 사나운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이숙번의 아들도 성질이 몹시 괄괄하고 공손치 않아 날마다 술과 음식을 차려 놓고 노느라 재산과 보물을 팔아 없애고 다시 그 집까지 팔아서 구차하게 되어 어찌 할수가 없어 군색 하고 배고프기 이를데 없이 되었다.
이에 친히 짐을 등에 지고 메고 하여 먼 지방에 사는 종의 집으로 가다가 중도에 양식이 떨어져 죽었다.
(이숙번은 일개 안산군수였는데 하륜의 계책으로 군사를 도성으로 끌고 들어와 태종 이방원을 옹립 하는데 공을 세운 공신이었다)
<자료출처:허봉의 海東野言중 曺伸(조신)의 소聞쇄錄(소문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