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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포은 선생 묘역 답사기

江村 2008. 3. 4. 10:03

<정포은 선생 묘역 답사기 >

 

고려문하시중 포은 정몽주

일찌기 1994년 양우당 출판사에서 이한조(李漢祚) 선생이 펴낸 포은집(圃隱集)에 이런 설명이 있다.

정몽주(鄭夢周)의 본관은 연일(延日: 迎日) 자는 달가(達可)요 지주사(知奏事) 습명(襲明)의 후손이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중에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려 놀라 깬 꿈을 꾸었으므로 그를 낳아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하였다.

나면서 부터 남달리 총명 하였으며 어깨에 일곱개의 검은 점이 줄지어 있어 마치 북두칠성과 같았다.

아홉살때 어머니가 낮에 꿈을 꾸니 검은 용이 뜰안 배나무에 오르는것을 보고 놀라 깨어 나가보니 다름아닌 몽란이었다.

그래서 몽룡(夢龍)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관을 쓸 나이가 되자 몽주(夢周)로 고첬다.

공민왕 9년 과거에 응시 세번 시험에 연달아 장원(壯元)하여 제일인에 뽑혔다.

 

이로부터 선생은 고려조정의 중요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대 정치가로 성장해 갔다.

당시 원나라를 섬기던 고려를 장차 명나라를 섬기자고 주장한이도 포은이었다.

포은선생은 공민왕 21년에 서장관으로 중국 남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파선되어 홍사범(洪師範)을 비롯한 8명이 죽고 선생을 포함 두사람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말 안장 가죽으로 13일을 연명하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황제가 배를 보내어 데려다 후히 베풀었다.

이때 원나라가 고려를 치려던 마음을 돌려 놓고 그간의 못바친 조공 5년치를 면제 받아오니 과연 나라의 대신다운 어른이었다.

그 머나먼 중국 사신길에 지은 시가 수도 없이 많으며 우왕 3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 우리 강토를 늘 노략질 하는 왜국을 이치로서 진솔하게 말하니 왜국이 그를 매우 존경하여 귀빈으로 대우 하였다 한다.

이 외에도 안으로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밖으로는 향교(鄕校)를 세워 유학(儒學)을 진작 시켰고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을 구제 하였다.

이상이 정인지(鄭麟趾)가 쓴 고려사(高麗史) 정몽주열전(鄭夢周列傳)대강의 내용이다.

 

한 왕실(王室)은 여러 충신들에 의하여 부지 되는것이나 최영(崔瑩) 장군이 가신 뒤의 고려 왕실은 포은(圃隱) 한사람에 의하여 지탱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광조(趙光祖)의 말을 빌면 ." 고려 오백년의 종사(宗社)가 한 사람의 몸에 달렸는데 그 한사람이 죽자 곧 종사가 망해 버렸으니 어찌 가히 이 사람을 경솔히 말 할수 있겠습니까 " 하고 중종에게 아뢰었다 한다.

- 圃隱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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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명한 단심가(丹心歌)는 선생의 묘택 입구에 세워져 있으니

 

이방원이 정포은 선생에게 이 하여가(何如歌)로 마음을 떠보자

 

      如此亦如何   (여차역여하)   이런들 또 어떠하며,
      如彼亦如何   (여피역여하)   저런들 또 어떠하리.
      城隍堂後苑   (성황당후원)   성황당의 뒷담이
      頹圮亦何如   (퇴비역하여)   무너진들 또 어떠하리
      吾輩若此爲   (오배약차위)   우리들도 이 같이 하여
      不死亦何如   (불사역하여)   죽지 않은들 어떠할까.


이에 포은 선생이 이 단심가로 화답해 충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내 보였다. 

 

      此身死了死了   (차신사료사료)    이 몸이 죽고 죽어

      一百番更死了   (일백번갱사료)    일백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      (백골위진토)       백골이 진토 되어

      魂魄有也無      (혼백유야무)       넋이라도 있고 없고

      向主一片丹心   (향주일편단심)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寧有改理也歟   (영유개리야여)    가실줄이 있으랴

 

이 단심가를 듣고 이방원은 그의 수하 조영규(趙英珪)로 하여금 선죽교(善竹橋)에서 철퇴로 선생을 시해 하였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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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 묘소 (경기도지방문화재 제1호, 기념물)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산 3번지


고려조 만고 충신 정포은 몽주(문하시중)선생이 역신들에 의해 선죽교 에서 한떨기 꽃으로 낙화하시니 당초 시신을 경기도 풍덕군 (개성 개풍)에 평장 (임시매장) 하였다가 항차 공의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묘코자 하였다 .

때에 이르러 그 면례(緬禮:무덤을 옮기는일) 행렬이 용인시 수지땅 풍덕내(豊德來:덕이 큰 어른이 오신곳-한자표기 豊德川)에 왔을때 앞에 세웠던 명정(命旌:고인의 관직,성씨를 기록한 기)이 홀연 광풍에 날려 대지고개를 넘어 지금의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하단에 떨어졌다.

행여의 행렬이 남으로 가고저 하나 행여가 움직이질 않았다.

할수 없이 명정이 떨어진곳에 장례를 모시니 지금의 능원,공의 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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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 선생의 신도비이다 .

국한문 혼용으로 쒸어진 이 비는 근자에 원 신도비문을 알아보기 쉽게 여러개의 비석으로 신도비각 곁에 세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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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 선생의 신도비각 (圃隱 鄭夢周 神道碑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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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선생의 묘는 을좌 신향에 술파, 저헌 이석형선생의 묘는 진좌 술향에 술파. 여기는 쌍유혈로 이석형의 묘소가 이 龍脈(용맥)의 主穴(주혈)이며 포은 정몽주의 묘소는 次穴(차혈)이다.

포은 선생 묘소는 좌측에 있고 약 100 여m 우측에 이석형 선생의 묘소가 있는데 얼핏 보기에는 마치 한집안의 선영으로 착각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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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형 선생의 묘소이다.
이석형(李石亨) 선생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옥(伯玉) 호는 저헌(樗軒)이다.

조선조 오백여년동안 이석형 선생의 후손의 혁혁함을 조사 하니 이러하다.

판서(判書) 42명 ,정승(政丞) 8명, 대제학(大提學), 정일품관(正一品官) 20명을 배출한 명문거족이다.

그는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문종 때 정인지 등과 <고려사> 개찬에 참여했다. 첨지한성부윤, 황해도관찰사, 대사헌, 경기도관찰사, 한성부판사 등을 지내고, 예종 때 숭록대부에 올랐다. 문장, 글씨에 능했다. 저서<저헌집>등이 있다.

 

이 산소를 쓰게된 재미 있는 전설이 있다.

정포은 선생의 명정이 날아와 떨어진 이곳에 지관이 찿아와 묘소를 쓰려고 사람들로 하여금 산역(山役)을 하게 하여 터를 잡게 하였다.

그때 연일정씨 포은공의 집안에서 연안이씨 가문으로 출가를 한 딸이 있었는데 그가 매우 영특 하였다.

그녀가 현장을 살펴 본즉 기가막히게 훌륭한 명당이라 욕심이 생겨 밤새워 그 묘자리에다 물을 길어다 부었다 한다.

이런줄도 모르는 정씨문중에서는 이튼날 현장에 이르러 광중을 파는데 온통 물이 흥건하게 나오므로 이곳을 마땅치 않게 여겨 버리고 바로 건너 현재의 포은공 묘자리를 정하게 되었다 한다.

그런 곡절 끝에 연안이씨 집안에서 이 산소자리를 차지하여 李公을 모셨다 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두곳 모두 명당이라 하는데 정포은공 묘소는 후손들이 번성하는 혈장이요

이석형 선생 묘소는 자손들이 벼슬아치가 많이 나오는 명당이라 한다.

과연 친정을 져 버리고 시댁을, 아니 자신의 자손들을 위하여 그리 할수 있겠다싶은 대목이 아닐수 없다.이로 부터 세간에 전해지기를 출가외인(出家外人) 의 구분이 엄해졌다 하는데 알수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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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 선생의 어머니(李氏)께서 지었다는 고시조이다.

역시 그 어머니에 그 아드님이다, 세상 이치가 원인없는 결과 없듯이 올바르고 현명한 부모 밑에 또한 忠孝한 자손을 두는건 당연한 결과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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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모재(永慕齋) 鄭圃隱 선생의 묘하에 있는 관리사이다.

끝으로 선생께서 생전에 지으신 수백수의 시중 일부만을 올리며 끝을 맺는다.

 

 有懷李陶隱鄭三峯李遁村三君子(유회이도은정삼봉이둔촌삼군자)

  -도은 이숭인,삼봉 정도전,둔촌 이집 세분 군자를 생각노라 -

( 이 시는 포은 선생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때 회계지방에서 읊은 시이다 )

 

     日長濃綠滿園林   (일장농록만원림)   해 길어 짙은 녹음 동산 숲에 가득

                                                     한데

     想見陶翁坐獨吟   (상견도옹좌독음)   도은 늙은이 홀로 앉아 시 읊는것

                                                     뵈옵는듯

     每遇鄭生留講學   (매우정생유구학)   매번 정생(정도전)을 만나 남아서

                                                     강학 하고

     時료李老共論心   (시료이로공론심)   때로는 이둔촌 늙은이 맞아 심학

                                                     (心學)을 함께 논해

     月臨屋角思顔色   (월림옥각사안색)   달은 집모퉁이 비쳐 안색을 생각

                                                     하고

     風動簾鉤訝足音   (풍동렴환아족음)   바람이 발 고리를 흔들어 발자국

                                                     소리인가 의심하네

     後會何時說今夜   (후회하시설금야)   뒷날 언제 만나 오늘저녘 이야기

                                                     하리

     明朝驅馬向淮陰   (명조구마향회음)   내일 아침 말달려 회수 남쪽 향하리

                                                     라 !

 

 楊子江 (양자강)

  - 도도한 양자강을 굽어보며 蜀,吳를 이긴 위나라 조조를 평한 시 -

 

     龍飛一日樹神功   (용비일일수신공)   용이 날아 하루만에 신공(神功)을

                                                     세웠으니

     直使乾坤繞漢宮   (직사건곤요한궁)   곧장 하늘 땅을 한나라 궁에 둘렀

                                                     구나

     但把長江限南北   (단파장강한남북)   단지 그 긴강이 남과 북을 갈랐을뿐

     曹公誰道是英雄   (조고수도시영웅)   조조(曹操)를 뉘라 일러 영웅이라

                                                     하는고?

 

 癸卯五月初二日有雨獨坐李遁村適來 (계묘오월초이일유우독좌이둔촌적래) 

  - 계묘년 오월 초2일 비가내려 홀로 앉았더니 둔촌이 마침 오다 -

 

     閉門聊坐睡   (폐문료좌수)   문 닫고 한가로이 앉아 잠이 드니

     微雨새園林   (미우새원림)   가랑비 내려 동산 숲을 적셨더라          

                                          ( 水변에 麗:적실새 )

     慾作靑春夢   (욕작청춘몽)   청춘의 굼이라도 꾸려 하였더니

     忽聞黃鳥音   (홀문황조음)   갑자기 누런 새의 소리 들리는도다

     蕪菁花結子   (무청화결자)   무청꽃은 열매 지고

     桃李葉成陰   (도리엽성음)   도리 잎은 그늘 지니

     時有西隣客   (시유서린객)   그때 서쪽 이웃 손님이 찿아들어

     相尋伴我吟   (상심반아음)   내가 시하는데 짝을 지어 주네

 

이렇듯 정 포은 선생이 둔촌 이집선생과 아주 절친한 벗으로 사귄 내용은 여러편의 시문에서 발견이 되고 있다.

당시의 둔촌 선생은 무관(無官)의 선비였는데 옳곧고 덕이 높기로 유명 했다 한다.

일찌기 둔촌 선생이 신돈의 무도함을 탄핵하여 당시의 썩어빠진 고려조정을 바로 잡고져 하였으나 

오히려  그로 인하여 둔촌선생은 역적으로 몰려 추포령이 떨어져 부친을 모시고 경상도 영천의 최원도 선생댁에 숨어 지낸 전설이 유명 하다.

역시, 이런분이기에 포은이 즐겨 벗했슴에 훌륭한 조상을 둔 그 후손들이 어찌 번창 하지 않겠는가?

둔촌의 자손들이 조선조 5백년동안 300 명에 가까운 문무과거에 등과하여 벼슬 하였다.

영의정 이극배,영의정 이준경,영의정 이덕형등 모두가 그의 후손들인데 어찌 다 열거 하겠는가.

서울의 강동구 둔촌동이 그로 인하여 명명 되었다 하니 대저 세상 일이란 이런것인가.

 

 

 2008,3,1 강촌 쓰다.

 

 

 

 

 

 

 

 

 

 

 

 

 

 

출처 : 주막집
글쓴이 : 江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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