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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강화기행

江村 2008. 4. 12. 17:12

강화기행(江華記行)

 

비오는 토요일 ...강화길은 멀고도 먼 길이었다.

아침부터 내리는 보슬비는 종일을 두고 그치지 않고 김포 통진으로 이어지는 지루한 길에 내렸다.

강화 역시 몇번을 다녀온 섬이지만 ~ 차만 밀리지 않는다면 여러번을 가도 싫증 안나는 곳이다.

고려천도설,병자호란,강화도조약등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현장인 강화도는 그만큼 한많은 우리의 소중한 영토이면서 아름다운 섬이다.

강화로 가는길에 오른편으로 문수산성(文殊山城) 이정표가 나왔으나 다음에 가보기로 하고 그냥 강화대교쪽으로 직진을 했다.

문수산성은 국사대사전에 보면고종때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킨 프랑스군을 무찌른 전적지이다.

또 택리지에 보면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인조대왕이 항복한 이유중에 하나는 바로 강화도가 적군에 함락되어 더이상 지탱할 희망이 없어졌기때문이라 한다.

강화에 있던 봉림대군이 항복을 결심하게 된 동기가 바로 문수산성이 용골대에게 떨어졌기때문이다.

대저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이를두고 말함이다.

당시 재상(宰相)이던 김유 가  그의 아들 김경징(金慶徵)으로 하여금 강화도 방수대장(防守大將)을 삼아 지키게 하였더니 끝내 용렬하고 교만한 경징은 술과 놀이에 골몰하고 군사에 전혀 방비를 하지 않다가 청장(靑將) 용골대에게 함락되어 무참히 섬 백성들이 도륙을 당하였다.

그 결과 인조대왕은 남한산성에서 나와 송파에서 항복했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8년의 긴 세월을 치욕스런 삶을 살아야 했고 삼학사가 잡혀가 죽고 허다한

인질과 백성들이 잡혀갔으며 조공을 바치는 국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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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돈대(甲串墩臺)

강화대교를 건너가면 바로 왼편에 있는 섬의 방어진이다.

갑곳이란 ~고려 고종때 원나라의 침공을 받아 이곳으로 피난 할때 군사의 갑옷(甲胄:갑주)만 몇벌씩 벗어 깔아도 건널수 있다 하여 갑곳(甲串)이라 명명 했다 한다.

그만큼 이곳 앞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곳이다.

하여간 이곳 갑곳돈대는 몽고병이 여러번 침략한 현장이며 고려때 대광(大匡)박술희(朴述熙)가 유배 되어 있는것을 왕규(王規)가 왕명을 거짓꾸며 죽인곳이며 뒤에 이 사실을 안 정종이 왕규를 이곳으로

유배 보낸후 처참(處斬) 했다한다.

병인양요때는 프랑스 해군제독 로오즈(Roze) 가 전함 7척으로 상륙한 현장이며

왜놈의 운양호(雲揚號)가 해군과 육병을 이끌고 기어 들어온 치욕의 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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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밖에서 이렇게 몇장의 사진을 찍어 오는게 고작이었는데 한많은 역사의 현장을 날씨도 애닮게

여겼슴인가 ~ 궂은비만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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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外奎章閣)

이는 사고(史庫)와 설치 목적이나 비장 목적물들이 비슷 하나 사고는 국가의 실록을 위주로 했던 반면 규장각은 왕실과 관련이 깊은 자료들을 비장해 두었던것이 조금 다르다.

1782년 2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으로,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 역할을 하였다. 설치 이후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를 비롯해 총 1,000여 권의 서적을 보관하였으나,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일부 서적을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에 타 없어졌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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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부종각(江華府鐘閣)

역시 고려궁지 내에 지어진 종각으로 그 옛날 이곳에 유수가 거(居)하며 정무를 살피던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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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헌(明成軒)

강화부를 다스리던  최고의 벼슬아치 유수가 정무를 살피던 동헌(東軒)

이 고려궁지(高麗宮址)는 고려가 몽고의 침략에 대항 하기위해 고종19년(1232년)에 이곳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과 관아를 세웠던곳이다.

이궁과 행궁,누각등 다양한 전각을 갖춘 궁궐이었다 하는데 모두 전쟁에 불타고 허물어졌다 한다.

조선 시대에도 이곳에 행궁을 짓고 강화유수부를 지었으나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에 의해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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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갈매기

강화의 거지갈매기들은 참으로 특이하고 희한 하기만 하다.

강화도 외포리와 석모도 석포리를 오가는 철부선을 타면 이녀석들이 먼저 반긴다.

몇번을 한려수도에 내려가 역시 배를 타고 오갈적마다 새우깡으로 제아무리 갈매기를 부르며 던져 주어도 전혀 달려들지 않았는데 ~ 유독 이녀석들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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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사에서 올려다본 낙가산(洛迦山) 눈썹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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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사 석굴번당(石堀法堂)

천연적으로 이우러진 거대한 바위굴 속에 법당이 있다.

그 앞에 육백년 묵은 향나무가 이렇듯 위용을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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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사의 향나무는 수령이 600년이다.

6.25 전쟁때 3년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전설적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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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가산 눈썹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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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눈썹바위 안쪽에 마애불상(摩崖佛像)이 새겨져 있다.

마애란 바위암벽을 깎아 새겼다는 뜻인데 .... 관음보살상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9호]로서 1928년 금강산표훈사 주지 이화응과 보문사 주지 배선주가 낙가산 중턱 일명 눈썹바위에 조각한것이다.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보관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정병을 들고 연화대좌위에 앉아 있는데 뒤에는 광배를 지고 있으며, 얼굴에 비해 넓고 각이진 어깨에 통견의를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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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눈썹 닮았는가 ~ 

아무리 사찰이 관리하는 곳이지만 저렇듯 철 파이프를 세우고 철사줄을 맨 모양이 썩 보기

좋지 안았는데 ...  아마도 사월초파일 연등을 달려는 작업인듯 한데 끝나면 철거 하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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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가산의 산벗꽃이 봄비를 맞아 더욱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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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에 피는꽃중에 이 산수유만큼 사랑스러운 꽃도 드물것이다.

마치 봄처녀를 보는듯 하여 아리따운 자태에 매료되는 순간이다.

 

          봄처녀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 오시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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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사 일주문 아래에 있는 식당엘 들려 점심과 동동주를 곁들이는데 그 집에 꾸며진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식당 벽의 곳곳에 이렇듯 재미있는 소품들을 만들어 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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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草芝鎭)

강화 길상면 초지리 해안에 설치된 요새(要塞)이다.1656년(효종 7) 강화유수() 홍중보()가 처음 설치하였고 1763년(영조 39)에 첨사(使)로 승격시켰는데 이 때의 병력은 병마첨절별사(使) 1명,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 18명, 목자()210명, 진선() 3척과 무기 다수가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이 곳에서  함대의 로즈 소장과 싸웠으며, 1871년(고종 8)에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로저스 중장이 이 곳에 침입하였을 때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다 함락된 바 있었고, 1875년(고종 12)에는 일본 군함 운양호(號)와도 이 곳에서 교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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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지나 버리면 잊어 버리기 쉬운일 ~ 저 소나무 두그루가 옛일을 기억해 떠 올리듯 해풍을 맞으며  의연히 서 있었다!

어찌 생각 하시는가 ? ... 이런 모든것 잊고 그냥 살아도 괜찮다 여기는가 ?

아 ~ 그러기에는 우리 선조들의 피가 너무 많이 흘린 땅이요 사랑스러운 강화도(江華島)가 통곡 하리라 나는 여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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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포(紅夷砲)

홍이포의 제원은 이렇다

구경 : 100 m/m

길이 : 215 cm

중량 : 1,800 kg

사정거리 : 700 m

포구에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포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砲口裝塡式火砲)로 조선 영조때 부터 주조하여 사용 하였다.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나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안아 위력은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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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 앞바다

지금은 물이 빠져 나가서 뻘이 드러난 상태이지만 물이 찼을때 아마도 저 등대가 서 있는곳으로 부터

이 요새를 향하여 포와 총을 쏘며 상륙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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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 앞바다

 

역시 저곳으로도 프랑스군, 일본군 미군이 침략해온 현장이다, 저 다리는 이곳 강화땅 길상면에서 김포땅 대곶으로 이어지는 길이 1.2km 에 달하는 대교로 2002년에 건설되었다 한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그 어느 섬 보다도 지리적,군사적,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국토의 일부이다.

그러 하기에 하많은 국난의 현장이 되어 온만큼 앞으로도 영구히 그 굴레에서 벗어 날수 없는 운명적 팔자를 타고난 강화도 ...우리땅 !

우리국토의 변방이면서도 오히려 역사의 고비때마다 중심에 서 있던 강화 !

그곳은 선사시대적 고인돌등 고대문화에서 부터 시작하여 금세기에 이르는 실로 다양한 역사가 함께 살아숨쉬는 우리국토의 변두리이면서도 오히려 중심이었슴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오늘의 이 답사가 이제 시작임을 알게 되었다.

이 자료는 작으면서도 거대한 강화의 진면목에 반하여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시인 한다.

앞으로 차근차근 더욱 좋은 자료를 얻고져 노력할것이다.

 

 

출처 : 주막집
글쓴이 : 江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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